
17세기 과학 혁명 이전까지는 점성술(astrology)과 천문학(astronomy)의 구분이 모호했다.
조선에도 국립 천문대와 같은 기관이 있었으며, 하늘의 별자리(天文)를 국가의 길흉화복과 연결해 해석하기도 했다.
16세기 프랑스의 예언가이자 천문학자로 알려진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는 실상 점성술사라고 해야 맥락에 맞다. 그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 집안 출신이었으나, 점성술과 신비주의에 심취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활동한 16세기 초·중반은 유럽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던 시기였다. 당시 그가 저술한 《예언집》에 흥미를 느낀 프랑스 왕비는 그를 왕궁으로 초청했는데, 그 인물이 바로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이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 가문의 상속녀로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앙리 2세와 혼인했다. 이후 그녀의 아들 셋—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으며, 약 40년 동안 카트린은 프랑스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점성술과 주술에 빠져 있던 카트린은 왕위 계승자인 아들들을 위해 노스트라다무스의 지식에 의존했다. 실제로 그는 카트린 치세 초기 비선 실세 역할을 했다.
1572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 중 하나를 주도한다. 바로 성 바돌로매 축일 학살이다. 프랑스의 종교개혁 지지자였던 위그노(Huguenot) 수만 명이 카톨릭 세력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당시 세느 강이 피로 물들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카트린의 집안 역시 로마 카톨릭의 핵심과 깊이 연결돼 있었다. 그녀의 큰할아버지는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교황 레오 10세였으며, 또 다른 친척 클레멘스 7세 역시 교황으로서 잉글랜드 종교개혁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여왕의 비선 실세 유대인 출신 점성술사 노스트라다무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프랑스어권 종교개혁이 최고조에 달하던 격동기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종교개혁가 장 깔뱅(Jean Calvin)도 있었다.
같은 시대 16세기 초중반 프랑스에서 노스트라다무스와 깔뱅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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